얼마 전, 지인들과 함께 합천 해인사, 하동 섬진강을 거쳐 지리산 성산재를 넘어왔다. 해인사에서는 대장경천년문화축전 행사 중이었고, 하동에는 서울에서 살다가 귀촌, 정착에 성공한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택규 전 전성여고 교사

우리 일행은 고즈넉한 농촌 풍경에 감탄하고, 남녘의 모든 산을 점령한 단풍바다에 자지러졌다. 그리고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에 하얗게 흩어진 래핑볏짚을 발견하곤 우리 농촌도 살기 좋아졌다고, 이 세상 어디를 둘러봐도 우리나라만한 데가 없다고 즐거워했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시골 출신이었다. 학창 때 고향을 떠나 도시 생활에 길들여진 사람들이다. 어쩌다 고향에 내려가면 친지들의 반가운 인사에 뿌듯하고, 승용차 짐칸에 가득가득 채워주는 인정에 익숙하다. 그래서 이들의 눈에 비친 시골은 아름답고 다사롭기만 하다.

내 고향은 산골마을이다. 산골이라고는 하지만 잘나갈 때는 300여 호였다는 집성촌이다. 한때는 그 동네 어린이들을 위한 초등학교가 있었을 정도로 번성했다. 지금은 문을 닫았지만, 분교 아닌 단위학교였다.

이웃마을에서 온 몇 명을 빼곤 대부분 동성 어린이들로 이뤄진 학교라 해서 전국적인 주목이 따랐다. 문화체육부 지원을 받은 한국향토사연구전국협의회가 대표적인 한국의 전통마을 ‘육백년 지켜온 한성받이 마을(1996, 수서원)’이라는 책자를 낼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저런 사연으로 젊은이들이 마을을 떠난 지금은 100호가 조금 넘는다. 겉으로는 그럴듯한 풍경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빈집이 널려 있다. 나는 최근에 이곳에서 2년 정도 거기 머문 적이 있다. 집성촌이라 눈에 띄는 어르신들은 모두가 할아버지·할머니, 아저씨·아주머니, 형님·형수님이고 간혹 동생, 조카뻘도 있다. 초등학교를 마치고 도회에서 떠돈 처지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의 고향 경험이었다.

한가롭게 보이는 농촌도 시간을 쪼개 쓰는 경제생활로 분주한 사회다. 출타하려면 승용차, 짐차, 오토바이를 이용하고, 몸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전동차로 이동한다. 이동수단이 없던 나만 맨 걸음이었고, 논밭 일거리에 낯설어 무료하고 답답한 일상이었다.

한심하게 소일하는 나를 위해 아저씨 한 분이 제삿날 빼놓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 곁을 지켰다. 아저씨라고 불렀지만, 항렬로 따지면 할아버지뻘이고, 칠순이 내일모레인 분이었다. 이 정도는 노인 축에도 못 든다. 동네일이라도 생기면 앞장서서 수족이 바쁜 ‘젊은이’다.

전주에서 장사를 하시다가 홀로 계신 노모 때문에 내려온 분이었다. 그 아저씨의 일상은 저녁 식사를 마치자마자 내 거처로 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무시고 동이 트면 일터로 나갔다. 그러면 하루 내내 나 혼자 남는다. 보이는 것은 적막강산뿐이다. 이동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적막강산에 내내 갇혀있는 셈이다. 옛날 유형자 신세가 이런 처지였을 거라고 여겼을 정도였다.

아저씨는 부지런하다. 논에서, 밭에서, 때로는 밤나무·매실나무 등 유실수를 가꾸기 위해 산을 타기도 한다. 그래야 형제자매에게 나눠줄 것이 생기고, 손자들의 용돈도 준비할 수 있다. 쉼 없이 움직이다보니 밤이면 끙끙 앓는 소리가 절로 난다. 어쩌다 고향을 찾아온 일가붙이에게 퍼주는 먹을거리는 이렇게 마련된 것이다. 다른 어르신들이 베푸는 후한 인정도 다 그렇다. 기를 쓰고 마련한 노고의 대가다.

고향을 지키는 몇몇 젊은이의 생활도 녹록하지 않다. 동네 사람들의 논농사는 이들 몫이다. 벼농사는 기계농이다. 콤바인, 트랙터, 바인더를 갖출 만큼 여유 있는 사람도, 그것을 조작할 줄 아는 젊은이도 드물다. 그들은 자가농에다가 남의 일을 떠맡아야 하기 때문에 한가할 틈이 없다. 동네 일이 끝나면 다른 마을로 원정을 가야 한다.

웰비잉이다, 건강이다 해서 수입 식품보다 국산이 인기다. 나는 평소 국산 농산물이 너무 비싸다고 생각했다. 다른 도시 소비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고향에 머무른 동안 단질(堂姪)의 직거래를 도운 적이 있다. 주로 서울 소비자에게 보내는 택배 작업이었는데, 동틀 무렵에 들로 나가 해질 무렵까지 거둬온 것을 선별, 포장하여 당일로 운송 회사에 도착시켜야 했다.

신선 식품은 이튿날 소비자 손에 들어가야 한다. 문제는 물건을 받아본 소비자의 반응이다. 변질했다고 반송해 오면 어쩔 수 없지만, 값을 깎아달라고 떼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농촌살이가 고달픈 것은 어제오늘이 아니다. 농절이 되면, 도시의 직장인들이 출근하려고 자동차나 전철로 이동할 때, 농사꾼은 새참 시간이다. 이렇게 일에 매달리다 보면, 육신의 피곤은 그렇다 치고, 풍작이면 물건이 넘쳐나서, 흉작이면 내놓을 것이 없어서 한숨이다.

우리의 농산품은 생산자의 호주머니를 위로할 만큼 비싼 게 아니다. 형편이 좀 나아 졌다 해서 까탈 부릴 때는 아직 아니다. 농업인의 현실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우리의 농촌은 고단한 삶의 현장이다. (양 택규 전 서울 진성여고 국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