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예정일 8일 전, 오후 5시경 ‘이슬’을 봤어요.
‘아침이슬’이 아니에요. ‘참이슬’도 아니에요.
애 낳았거나 낳아볼 여자는 안다는 그 ‘이슬(자궁경부를 막고 있던 두꺼운 점액이 배출되는 것)'
암튼 ‘이슬’은 출산 신호탄 정도 되는 거에요.
그런데 어라?..배가 살짝쿵 아파와요.
임신 내내 가진통 한번 없었던 임신체질녀는 ‘이슬보더니 가진통이란 것도 하나보다’
맘 편하게 생각해요.
그런데 요 통증이 점점 심해져요. 아팠다 안아팠다 하는 게 영 불길해요.
진통주기가 30분, 20분, 15분, 13분
들쑥날쑥한 것이 설마 진짜 진통일 리가 없겠지? 생각해봐요.
그런데 요렇코롬 아픈게 그냥 가진통일까? 그럼 진짜 진통은 죽으라는 거임?
오마이갓~ 여자는 덜컥 겁이 나요.

이때 남편이 퇴근하고 왔어요. 이 남자도 느긋하게 택시 안타고 버스 타고 왔다가
쪼그려 앉아 아파하고 있는 여자를 보더니 당황해요.
그래도 둘은 병원가기 전에 밥을 먹자 했어요. 어디서 보니 애 나올 때까지 여자도 남자도 굶게 되니 밥은 꼭 챙겨먹으라던데 여자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어요.
애 낳기 전에 힘쓴다고 삼겹살, 삼계탕 먹고 가는 여자들은 뭘까 생각해요.
남자는 여자가 굶거나 말거나 밥을 먹어요. 심지어 반찬 별점 줘가며 먹어요. 어이없어요.
하지만 2박3일 진통하는 여자 옆에서 부스럭거리며 빵 꺼내다 장모님에게 딱 걸리지 않으려면 지금 먹는 게 나아요.

10시경 병원에 도착했어요.
태동기 달고 검사한 뒤 간호사는 여자를 가족분만실로 안내해요.
무통주사 놔 달랬더니 간호사 진행이 너무 빨라 안된대요.
무통 주사만 믿고 있던 여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아요.
간호사 잠깐 내진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따뜻한 느낌이 들어요.
간호사가 양수를 터뜨린 거에요. 우리 아기를 38주 동안 보호해 줬던 양수야 잘가..

그리고 계속되는 어마어마한 진통.
여자는 학창시절 뇌염주사 맞을 때 제일 먼저 달려가 팔을 걷는 용감한 여자였어요.
출산의 고통도 세상 여자들이 다 견디는 것이니 어느 정도 이겨낼 수 있을 줄 알았어요.
아니 이게 웬걸요. 상상초월!! 전대미문!! 무엇을 생각했든 그 이상!!
이걸 겪고도 둘, 셋 아이를 낳는 세상의 엄마들은 또 뭥미?!!

지독한 고통에 여자는 이성은 잃고 짜증만 남아요.
무통주사의 도움도 못 받고 제왕절개도 안하면
현대의학의 도움은 하나도 못 받는 것이 아니냐며,
이러면 신석기 시대 동굴에서 애 낳는 여자와 내가
매트리스 한 장 깐 것 말고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이냐며
21세기에 이런 원초적인 시스템이 말이 되냐며
여자는 맘속으로 마구마구 분개해요.
하지만 수술 시켜 달라 목소리가 안 나와요. 말도 못할 만큼 아파요.

겨우겨우 간호사에게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아파요” 말했더니
“아파야 애가 나오죠!!”하고 쏘아붙이는 게 아주 혼내는 말투에요.
간호사 딱 봐도 미혼인데 아는 척은!! 여자는 화가 나요.

남편은 옆에서 “호흡해 호흡!” 하면서 후!하!후!하! 요란스럽게 호흡을 강요해요
출산교실에서 한 시간 배운걸 아주 잘 써먹고 계세요. 여자는 남편도 너무 미워보여요.
왜 드라마에서 남편들의 머리채를 잡아 헤드뱅잉 시켜주시는 이해가 가네요.

어서 진통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여자 맘도 몰라주고 시간은 더디게 흘러 자정을 넘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