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성덕용

봄날에
-밤마다 촛불이 켜지던 4월-

성덕용

햇살은 먼 곳에 있고
몸은 차가웁다
꽃은 피었으나 나비는 날지 않는다

이즈음 일어날 법한 탄성은
배꼽 아래 움크린 채 허리띠를 조인다

'허기진다' 말을 하고 싶으나
그 마저도 사치스럽다며
파랗게 튀어 오르는 아지랑이

햇살을 찾으려고 조심스레 문을 연다
창틈에는 오래 전 부터 힘 겨루기를 한듯
황사 더께가 무너져 내린다
그 더께를 넘어 더 많은 황사가 몰려온다

햇살은 멀고
꽃은 피었으나 나비는 날지 않는다

내린천 노루목에는

성덕용

엷은 잠옷을 걸쳐 입고 아직은 잠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삼신할미의 둔부가 움씰거린다
할미의 젖무덤은 술항아리에서 갓 빠져나온
복숭아 물빛이 흐른다

오랜 잠으로 혈색을 잃었던 산이다

산모의 젖빛같은 농주에 취해 한눈을 파는 사이
삼신할미는 잠자리를 거두고
어여쁜 새색씨가 되어 앉았다
내린천을 흐르는 권주가에
서울객은 진달래꽃빛이 되었다
얼굴도 붉고 마음도 붉은데
눈에는 푸른빛이 가득하다
그 눈빛 속을 뛰쳐나온 손이
삼신할미 둔부를 취해 줄행랑을 친다

이제도 내린천 노루목에는 농주가 흐르고
진달래꽃 숲에선 어울렁더울렁 붉은 숨소리 들린다

지우개

성덕용

그림을 그린다. 연필을 깎고 지우개를 자르고
도화지를 분할하며 그림을 그린다.
백지는 손을 떨리게 하고 가슴과 눈을 떨리게 한다.
냅다 연필로 선을 긋는다. 백지는 이제 백지가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선을 그었으므로

무엇을 향해 그엇는지 모를 선 하나가 앞으로의 생명이다

세밀한 관념을 만들기 위해 조각내었던 지우개들은
불만스런 표정이다 왜 잘랐는데, 왜 그랬는데
허다한 지우개 조각들은 허투로 그려진 연필 선만도 못하다

떨리는 손으로 이제도 선을 긋는다
이 선들이 모여 무엇이 될지는 아직 모른다
'뭔 짓거리 하냐'
대답할 말이 없다

백지는 이제 백지가 아니다
너무 많은 연필 선들이 춤을 추고 노래를 하므로
무엇을 향해 그엇는지 모를 선에서 물소리가 들린다
지우개는 그 물소리를 지우지 못한다